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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이 본 이번 대선 "BBK 같은 것은 걱정 안 했다" 본문

정경사

이문열이 본 이번 대선 "BBK 같은 것은 걱정 안 했다"

로뿌호프 2007.12.24 06:40
소설가 이문열이 본 `10년 만의 좌 → 우 대이동`


"보수를 민망스럽게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7대 대선 결과에 대해 소설가 이문열(59)씨가 내놓은 소감이다. 만 2년째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그가 잠시 귀국했다. 새로 펴낼 소설 '초한지'의 편집과정을 살펴보러 왔다고 한다. 대표적 '보수 논객'으로서, 보수 편을 들다 '책 장례식'이란 가공할 상처까지 받았던 그다. 심성이 황폐해지는 느낌을 견디다 못해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던 그는 10년 만에 '좌에서 우'로 정권이 교체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22일 오후 그를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들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고맙고 기쁘다. 고맙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특별한 뜻이 있다. 내가 주제넘는 연민이나 불필요한 걱정 같은 것으로 보수 논객을 자처하거나 혹은 우파의 후원자를 자처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홀가분한 맘으로 원래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고맙게 느껴진다."

-대선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나.

"'어렵지만 이기지 않겠는가' 정도로 예측했는데, 압도적 표 차에서 의외나 놀라움 정도가 아니라 묘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칼로 자르듯 돌아서는 민심도 그러하고, 이런 형태의 사회적 판단, 정치적 판단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 사회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할까 하는, 낙관적인 기대보다도 어떤 우려 같은 것이 들더라. 민심은 언제든 이번처럼 돌아설 수 있는 것이고, 다음에 다시 민심이 돌아서게 만든다면 단순히 한 정권의 몰락이 아니라 대한민국 운명을 바꾸는 결과가 될 것이다."

-승패를 가른 요인은 뭐라 보나.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다. 나는 사실 BBK 같은 것은 걱정 안 했다. 하지만 자녀 위장 취업 문제가 나왔을 때는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중소기업 사장도 안 하는 일이다. 그걸 대통령 후보가 2006년까지 하고 있었다니. 마비라 해야 할까, 주의 소홀로 보기도 어려운 도덕적 마비, 둔감 현상이었다. 그것도 참 천민자본주의적 둔감인데…. 이것이 이명박 정권에서 어떤 형태로 바뀌든, 또 나타나면 끝장이다. 이번에는 용케 용서받았고, 국민이 왜 용서해 줬는지 이해는 안 가지만, 반복되면 끝이다. 이 당선자가 엄중하게 기억해야 할 거라 생각한다. 도덕성 부분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정말 깨어 있어야 한다. 조심 또 조심해서 가기 바란다."

-진보 진영이 참패한 이유는 뭘까.

"2002년 대선에서 다수를 몰아줬던 진보도 전부 진성 진보가 아닌 거다. 우리 사회에 실용주의 혹은 실리주의라 할 세력이 있다. 이들이 2002년엔 진보에 기대를 걸었고, 이번엔 보수 쪽에 건 것이다. 흑묘든 백묘든 괜찮다는 그런 세력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당선자가 '실용 보수'란 표현을 썼는데.

"보수의 유연성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본다. 보수가 지고 있는 덩치 크고 아주 골치 아픈 짐이 하나 있다. 그 짐이 일을 낸 게 이회창 후보의 돌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도 상당한 세력이다. 15%나 나왔다. 한 달 앞두고 정당도 없이 나와서 15% 된다는 것은 그 짐의 뿌리와 힘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도 개혁'이라는 말을 쓰면 우파에서 상당히 멀리 가 버리니까 중도니 개혁이란 말 안 쓰고도 유연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실용이 아닐까 싶다. 2004년 총선 때 박근혜 전 대표도 실용주의란 말을 썼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싱크탱크 역할을 할 때로 기억된다."

-이른바 '보수 내전'은 어떻게 전망하나.

"중간지대에 있던 내가 한나라당 후원자를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원래 그대로의 한나라당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부영.손학규.이재오.김문수 등이 있는 한나라당일 때 자신 있게 후원할 수 있었다. '도로 민정당' '유신당', 더 심하게 옛날 반공 만능주의 세력이 된다면 지원하기 고약하다. 이런 말 하면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 텐데,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경선.총선 과정에 많이 들어와 있다. 이걸 정리하는 과정에서 보수로의 회귀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프랑스 같은 경우도 극우파로 분류될 수 있는 세력이 15% 정도 있는데,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씁쓸한 기분이다."

-2006년 중앙일보 창간 41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에서 "지금 세대를 주도하는 것은 진보 우파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 '진보 좌파'는 가능해도 '진보 우파'는 가능하지 않다는 반론이 많았는데, 이 자리를 빌려 설명해 달라.

"당시 많은 화제가 됐던 것을 나 역시 기억한다. 진보 우파라 할 때 나는 내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태도를 말한 것이다. 더 공식화하자면 변화에 대해 낙관하는 태도가 진보가 될 것이고 변화에 대해 불안해하는 태도, 지금이 더 잘 된 것이라 믿는 쪽이 보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보 우파가 가능한 것이다. 진보라는 것은 태도 면을 말하는 것이지 내용이 아니다. 진보적인 우파, 진보적인 좌파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 이념은 우파지만 그 태도는 진보적인 것을 말한다. 반대로 좌파의 전통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40년, 50년 된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는 보수적인 좌파도 있을 수 있다. 한국에 그런 좌파가 많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될 수 있을까.

"실용주의의 대척점이 이념이나 이상일 것이다.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때 이상이나 이념에 따른 선택은 현실적으로 나한테 손해 나더라도 이상이 아름다우므로 이것을 한다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이상이 아름답더라도 현실적으로 불리하다면 안 하겠다는 것이다. 정책 판단 기준으로 새 정부가 선택한 것인데 그대로 잘 하면 되지 않을까(웃음)."

-그런 점에서 새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어차피 문학 쪽, 문화 쪽 사람이니까 그쪽에 점검이 있었으면 한다. 문화 방면에 대한 권력의 제어력이 커진 것을 조정했으면 한다. 지금까지 지향해 온 방향 자체도 검토해야 한다."

-무슨 뜻인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정치력이 문화를 장악해 버렸다. 내가 보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정도가 심하다. 노무현 정부는 큰 정부였다. 경제.정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는 더 했다. 예컨대 지난 정권보다 노 정부 들어 문학에 대한 지원이 몇십 배 커진 것 같은데 좋게 보면 문화에 대한 지원이 되겠지만 나쁘게 보면 그 분야에 대한 장악력을 키운 것이다. 문화가 정치 권력 혹은 사회 권력 쪽에 예속된 지금의 형태는 아주 진지하고 시급하게 검토돼야 한다. 이상한 것은 지원은 많은데 문학의 힘은 약해졌다. 10년 전만 해도 베스트셀러는 우리 작가들 작품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외국 책이 더 많다. 스크린 쿼터처럼 문학도 쿼터가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 10년의 문화정책이 콘텐트 산업을 망가뜨린 것 같다. 영화라든가 하는 각 분야의 많은 것이 스토리에의 의존성이 크고, 그것을 담당하는 것이 문학인데 10년 전의 10분의 1도 안 될 것 같다."

-역사소설은 그래도 인기가 있는 것 같다.

"거대담론의 틀을 빌려 오기 좋은 것이 역사소설 아니겠나. 거기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거대담론을 원하는 측면이 있다. 거대담론은 이야기가 되고 전파력을 갖는다. 사소설적인, 내밀한 내면을 묘사하는 작품을 읽으면 '좋더라. 내면을 잘 그렸더라' 정도로 소감을 말하는데, 그 말 듣고 나도 사 봐야지 싶은 생각은 안 든다. 독자들과의 거래에서는 거대담론만 한 게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외국하고 거래할 때도 우리 역사적 소재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된다. 내 책 중 가장 많이 번역된 게 '시인'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역사적 소재를 그린 것이다. 힘들이지 않고 우리적인 것을 많이 담을 수 있게 된다. 외국과의 거래에서 우리 역사성이라는 것은 아주 매력적이다."

-작가로서의 회한은 없나.

"떠난 것 자체가 바로 그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작가로서의 삶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거리 두기'였다."

-미국 생활이 작품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결코 낭비는 안 될 것이다. 미국 사회에 대한 어떤 전반적 느낌도 생기는 것 같다."

-연말연시인데 마음의 위안을 주는 말씀 한마디 부탁한다면.

"오는 날에 대해 낙관을 갖자는 것보다 서로에게 격려가 될 만한 말이 있겠나. 어제보다 훨씬 나은 내일이 있다고 믿기를 권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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