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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로뿌호프 2011.03.29 12:28

공감하는 부분과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그야말로 '격렬하게' 공감했다.
어찌 보면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닌 벼랑에 떨어뜨려 지지 않은 사자 새끼의 나약함을 인간세계에 투영한 것과 같은 쓸쓸함이 느껴진다.

'실격'이라는 말은 어떤 기준에 미달하거나, 반대로 기준을 초과하거나, 혹은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는 것의 기준이나 규칙을 정의하기가 쉬운 일인가.주인공은 첫 장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자신의 일생을 고백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말은 단순한 후회라고 하기에는 억울함과 항변의 색깔도 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이 순순히 인정한 인간과 실격이라는 기준을 생각해보자면 결국 그 시대의 제도, 지배 논리, 그리고 사회구성원들의 공통 규범 정도라 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는 곧 마땅한 기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한 역사가 '아와 비아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생애도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들의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대부분 관계에서 자신이 아닌 것들은 가족, 이웃, 학교, 사회 등등의 사람 그리고 법, 제도, 관습 등의 규범 등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시기이며, 확실히 주인공이 살았던 5-60년대의 일본사회 혹은 지구에서는 그의 행동은 마땅히(?) 잘못되었고, 부끄러운 행동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소설은 돌이켜보면 당연함에 대한 반기이다. 속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보자면 사회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다른 것과 함께 틀린 것의 차이. 사회화에 대한 명확한 구분. 본질과 현상 이 모든 것을 두루 살펴보자면 전후 일본 사회의 거대한 위선과 폭력에 침몰해버린 소심한 사내의 비극이란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이런 것과 같다. 거대한 사바나초원 속에 사자가 있다. 그 사자는 여느 사자와 달리 풀을 뜯어 먹는다. 풀만 먹다가 가끔은 다른 동물의 살을 먹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 사냥을 하지 못하는 사자라고 하자.

당연히 사자의 세계에선 존재할 수 없는, 즉 사자가 아닌 짐승의 출현이다. 결국, 이리저리 치이다가 무리를 떠나거나 죽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며, 이는 부끄럽거나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벌어지는 숙명이다. 짐승의 세계에선 그것이 '본능'이라면 인간의 세계에선 무엇일까. 아마 규범일 것이다. 공동체 전부를 위한 것도 아니며 우리가 알 수 없는 위정자가 파워엘리트가 짜놓은 규칙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검은 고양이가 출현했다 사라지는 현상을 통해 시스템의 결함을 눈치챌 수 있다는 장면이 나온다. 빨간 약을 먹고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진정한 인간의 세계로 떠난 네오처럼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아무런 약도 먹지 않고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고민하고 회의하고 때로는 일탈하는 사람이다. 자각하는 개인이 모두가 네오나 트리티니같은 혁명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슬프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 본능과 이성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미 사자가 새끼들을 벼랑으로 밀었을 때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떨어졌어야 할 나약한 새끼가 살아남은 것과 같다. 앞서 말했던 풀 뜯어먹는 사자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나약한 사자는 자연세계에선 벼랑 앞에서 살아 남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것이 동물 세계의 냉험한 본능이 작용하는 사례라고 한다면,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이성을 지닌 인간의 세계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소수자에 대한 인정,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실상 인간의 세계도 그렇지는 않다. 약자가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성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이성에 근접하려면 적어도 자기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야 하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조에게 '인간의 자격'이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자기 존재가 슬프고 허망하고 나약하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 인간세계에선 그것은 들키지 말아야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남에게 인정받고 보장된 자격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요조의 허무함은 타인들도 솔직하지 않다는 것과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더욱 깊어진다. 패전 후 일본 사회에선 이러한 인간 속내의 바닥을 드러내기에 더욱 충분한 시기였다. 게다가 요조처럼 부유한 집에서 나고,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명석한 두뇌로 학교성적도 우수하고, 나아가 사람들앞에서 익살을 부릴줄 아는 쾌활한 성격을 지닌 소위 축복받은 인간이 이러한 고뇌가 있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한계를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조의 나약함과 순수함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모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식적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모든 사회시스템은 지배자의 착취 도구라고  할 수도 없다. 아마도 가장 분명한 건 세상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불안정하고 불안한 세상을 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그것은 출신성분과 계급도 그리고 기독교와 같은 종교마저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자기 영역이 있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한명 한명이 독립된 세계이지만, 불행히 이들이 이루고 살고 있는 세상도 완벽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 세상에 '절대'나 '완전'은 없다. 그것을 알건 모르건, 또 움추리거나 혹은 세상에 나서거나 원천적으로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자기의 내면도 알 수 가 없는데, 하물며 바깥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적응하거나 부적응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결국 다자이 오사무는 세상에 항변하거나, 사회를 변혁시켜나 하는 차원의 문제제기가 아니라, 너무 일찍 우주를 알아버린 혹은 너무나 조숙하여 인간의 위선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르는 나약한 한 인간이 '방어기제' 속에서 안주하기에도 순수한 요조라는 사람을 통해 끝없는 염세와 허무주의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먼저냐, 제도가 먼저냐를 떠나 결론적으로는 이 세상은 어떤 이유에서도 온전히 행복하기는 힘든 세상이라고 할 때, 경제적이던, 제도적이던 아주 많이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개선해야 하는 의지는 필요하다는 행간의 뜻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다자이의 기준으로 보면 나 역시 쓸떼없이 긍정적인 인간의 탈을 쓴 하나의 모래알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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