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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계몽영화(Enlightenment Film, 2009)

로뿌호프 2012. 1. 8. 00:03
삶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거의 대부분 타인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존재하기 힘들다. 

지도를 보고서도 찾아가기 힘든 산사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의 수도원에서의 영적인 생활을 하는 소수의 수도자를 제외하고 삶이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잘 살고 있느냐 아니냐 그 사회의 질서나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에서 많이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 시절로부터 6.25전쟁과 군사독재 시절을 거쳐 한 부유한 가정의 3대의 일상은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3대의 일상은 평범하고 소소하여 비판의 칼날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부역하는 친일파 1대의 우유부단함과 2대의 다방에서의 프러포즈 장면 그리고 학창시절 시위에 참여도 하고 지금은 대한민국의 여느 여피족처럼 기러기 아빠를 둔 3대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특별함은 커녕 전형적이지도 않은 그들의 삶은 친일파와 우익이라는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든다. 

중심부에 서야 한다 

영화 중반에 2대 아버지는 3대인 딸이 초등학생일 때 그 딸의 졸업사진을 보다가 딸이 단체의 가장자리에 서서 찍은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주변부에 있지 말란 말이다. 중심부에! 중심부에 서야 한다! 알겠냐 중심부에!" 순간 사진 속의 그 나이대의 수줍은 표정의 딸의 사진이 정말로 무색해 진다.

어찌보자면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 그 갈망은 친구들보다 좀 더 나은 옷이나 책가방이나, 동료들보다 나은 집이나 차일 수도 있고 삼성재벌처럼 거대한 재산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역사상 그 어느시대보다도 물신주의가 팽배한 요즘은 자신의 인격 조차도 얼마냐에 따라 매매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로버트 레드포드와 데미무어의 <은밀한 유혹>이라는 영화에서는 가난한 아내가 우연히 만난 부자 노신사에 백만불에 하룻 밤을 판다는 내용이다. 장기매매하고는 또 다른 얘기겠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다지 허무맹랑하거나 낯설은 이야기가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100만원이면 안될 일이 1천억원이라면 가능해지는 일은 아주 많을 것이 분명하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여하튼 제목의 '계몽'이라는 것이 영화 속에서, 혹은 영화 이후에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반대로 욕망의 관점에서 친일파 3대의 일상을 되짚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젝의 욕망의 정의 개념을 잠시 빌리면 "욕망이란 우리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철학적인 명제라 여러가지 논란이 있는 주제이겠지만, 이 영화에 차용하자면 '친일'에서 비롯된 사회적 욕망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전쟁과 현대를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방식과 좌절 그리고 부조리가 태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평에 의하면 영화는 친일파에 대한 비판없이 오히려 이해하려만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어떤 의미로 본다면 친일이던 독립운동이던 사회나 민족의 가치에서 자신이 어떠한 욕망을 취했느냐의 관점의 차이를 말할려고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영화 속에서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회 대다수의 가치에 반하는 지극히 사익을 추구하는 방식의 욕망은 결국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냐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동무의 가솔을 보살펴 주던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1대는 결국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밀고를 하게 되고, 그 2대는 아버지의 반민족행위에 대한 반성은 커녕 6.25를 빌미로 그저 빨갱이탓만을 하며 산다. 3대에 이르러선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것을 쉬쉬하며 왠만큼 사는 집안의 유행처럼 자녀 조기유학에 기러기 아빠 생활을 영위하거나 악덕 중소기업 사장이 되어 노조를 눈에 가시처럼 여긴다.

누구나 역사적 사명을 개인의 삶과 일치시키고 매순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1대가 식민지 소작농의 실태에 번민을 하거나, 2대가 민방위 훈련 싸이렌에서 전쟁의 상혼으로 데이트를 하다말고 처마밑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거나, 3대가 소위 사회 변혁을 위해 운동을 하던 대학동창들과 회고담을 나누거나 하는 데에서 보이는 암시는 역사와 동료에 대한 사적 욕망의 그릇됨과 또 잘못에 대한 반성 없는 삶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겁한 변명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일상과 우리의 일상은 다르다

영화 속에선 '먹고 사는 것'의 굴레에선 한참 벗어나 부유한 생활을 하는 3대에 며느리로 들어온 미망인은 딸에게 이렇게 일러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사는 것은 다 할아버지 덕분이지" 라고. 나는 이 말에 계몽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도 식민지 조국도 안중에 없는 자신들의 사적이익이라는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을 통해 어떠한 단죄도 반성도 없는 평범해 뵈는 그들의 일상이 지금 우리의 왜곡된 사회구조에 일조하는 담당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러한 개탄할 생활이 비판 받기는 커녕 되려 이 사회의 주된 흐름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미 우린 계몽과는 한참 뒤떨어진 정당과 대통령을 뽑아 놓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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